그리스인 조르바 평론
춤의 의미
편집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중요한 의미로 등장하는 '춤'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인생을 하나의 유희판으로 여기려는 태도, 가치관과 관계된 것이다. 이는 희극과 비극이 교차되어 일어나는 인생이라는 무대에 스스로가 충실한 희극배우임을 깨우치며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가 영향을 받은 니체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자면, 니체는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에서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겠다고 말한다. 니체에게 가장 상위의 인간 유형은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사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데, 웃음과 춤은 이러한 유형의 인간이 수반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2]
원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나'는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반복해서 되묻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불행한 시시포스와 같이 똑같은 일상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살기 위해 일상을 영위한다. 일을 하는지 일상과 일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지, 무엇이 우선인지도 모른 채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이렇게 일생을 어떠한 틀에 가둔채 사육되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에서 윤리를 배우고,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학습을 받으면서 차츰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아직도 태어났을 때의 그 탯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르바가 이해하는 인간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자유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주인공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조르바가 두목에게 한 말은,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묶인 채 우리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곧 이따위 돈 벌이를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야!’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 결의는 두목이 “언젠가는 자를 거요”라고 내뱉는 말과 똑같다. 조르바는 ‘내가 묶인 줄’을 자르지 않고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누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조르바의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조르바가 현대인들에게 자유의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간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참조
편집-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변재길 <영상시대의 문화코드>
- ↑ 안남연 <『그리스인조르바』에 나타난 인간의 자유와 삶의 의미>
- ↑ 이상민 http://webzine.djac.or.kr/webzine1402/html/sub_con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