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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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삼각형 (옥든과 리차즈 1923)
 
상징 사이클:
의미 삼각형(1923)의 태극화

사물의 다름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 바, 심한 경우는 창조란 단순히 닮음의 파괴라고 말한다. 무릇 이 세상의 어느 둘도 똑같지 않다. 그런데 똑같지 않음은 완전히 다름이 아니라 닮음도 있음이다. 모든 것은 다르다고 보는 단순한 시각은 엔트로피, 복잡성 또는 혼잡성의 극대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서 매우 비현실적이므로 결코 바람직한 견해나 사고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우리 언어을 보면, 낱말이 닮음을 토대삼아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먼저 개와 늑대라는 닮은 꼴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나아가 그 둘이 비슷하지만 역시 다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는 사람에게 온순하게 충실하게 길들여진 늑대인 것이다.

우리가 다름과 닮음의 상호보완적 음양 괸계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까닭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우리의 말와 마음의 바탕임을 모를 만큼 일반언어학과 심리학을 경시하는 세계적 교육의 맹점을 넌지시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과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드물다.

일반대중은 물론 학자들도 말뜻은 마땅히 말속에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와 같은 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믿음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도, 영미계열의 분석철학에서도, 인공지능적 언어처리에서도 굳건한 바탕으로 자리잡아 왔는데, 그들의 기초가 부실한 만큼 그 위에 세워진 성과도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이후 거의 1세기에 걸친 계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이동풍의 풍조가 지배적이다. 말속의 말뜻을 의심하면, 말뜻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말뜻은 말속에, 사물속에, 그리고 특히 마음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말씀은 모든 것을 지당하게 말해주지 않는 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그 뜻을 새겨 듣게 돕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자극일 뿐이다.

말씀과 뜻, 표현과 표상, 언어와 사유는 우리 마음을 지탱하는 두 다리이고, 또 그 두 다리는 언제나 마음을 통해서만 연결된다. 컴퓨터처럼, 마음이 없으면 그 두 다리도 없다!

말뜻은 마음과 상관없이 말속에서 스스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맘속에서 의도적으로 떠올리는 생각 또는 아이디어다. 아마 그래서 뜬다는 뜻의 "뜻"일 것이다. 아니면, 듣는 사람 마음이라는 뜻의 "뜻"일 것이다. 알아 듣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말씀은 하나 마나 있으나 마나다.

이원론자 칼 포퍼는 "객관적 지식"(1972)에서 세계를 자연의 물질세계와 인간의 정신세계 곧 세계 1, 2로 분리시키더니, 마침내는(c. 1977) 정신적 문화적 소산의 물질세계를 세계 3으로 설정하고, 여기에 알아채는 주관이 필요없는 "객관적 지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객관주의적 실증주의적 원자주의적 분석철학자다운 주장이고, 아마 몸과 마음을 스피노자처럼 하나로 보기가 매우 어려운 어리석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11111 + 22222 = 33333 이라는 어리석은 "객관적 지식"이 어느 책에 쓰여 있을지 도무지 의심스럽다. 그런 지식은 본래 책보다 차라리 사물의 이치 속에 숨어 있으며, 그 이치와 연산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 또는 지식 속에 숨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객관적 지식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이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고 슬기로운 모든 정신적 성과가 그렇게 존재하되, 그 물질적 소산은 시간적 공간적 소통에 도움을 줄 뿐, 그 뜻은 어디까지나 사물의 본질과 그것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뜻은 그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객관주의자(반주관주의자) 힐러리 퍼트남의 지적(1975)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로더릭 치숌(1976)은 콰인의 "말과 객체"(1960)에 말대꾸하는 식으로 "인간과 객체"(1976)을 내세웠다. 또, 리차드 로티(1979)는 언어가 자연의 거울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에 반대했다. 한편 심리학자 조지 깁슨도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어포던스(1978)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모든 주장들은 마땅히 또는 마술처럼 말속에 말뜻이 있다는 상식이 오류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말은 마음이 비롯이고 마침이다. 그러나 마음이 환경과 사물 속에서 아무런 의의도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말의 비롯도 마침도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사물과 마음의 합작품이고, 따라서 전체적으로 삼각관계이지만, 더없이 중요한 사실은 말과 사물은 반드시 마음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옥든과 리차즈는 의미의 의미(1923)에서 이같은 비상식적 과학혁명적 명제를 맨처음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긍정적 부정적 영향이 너무도 엄청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오리려 그들을 시기하고 외면하고 따돌리기 일수였다. 논리주의를 창시하고 논리적 실증주의를 적극 옹호하고 분석철학의 기초를 놓은 버틀란드 러셀이 두번씩이나 뼈아프게 반박하는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혁명적 이론이 그의 모든 철학체계를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채 폭파해버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셀 류의 분석적 철학체계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고, 20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이전까지 내내 그 영광과 번영을 이어갔다. 학계는 더 좋은 이론이 땅땅 큰소리칠 수 있는 세계가 결코 아닌 듯하다. 더 좋은 이론이 큰소리칠 수 있는 세계는 학계가 아닌 다른 데인 듯하다. 학계는 마냥 기득권을 지키는 데인 듯하다. 교학사 국사 교과서 사태가 아마 그 좋은 한 사례일 것이다.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던 우리는 알 바 아니고, 우리는 오직 우리가 쌓아 올린 학문적 성과가 절대 옳다고 밀어붙일 뿐이다. 우리가 그르다는 것은 아마 너희 편견일 것이다. 만사가 이런 식이다. 모두 모든걸 편견으로 돌리고 편견만 탓한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로지 편견 덕이다! 편견이 판치는 것이 아니고, 편견없이는 도무지 우리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쪽을 보는 것은 저쪽을 보기를 포기하는 대가일 뿐이다. 하느님처럼 이쪽도 저쪽도 다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동물은 아무래도 그런건 안되는 짓임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 교육이 이런 걸 모든 사람들이 깨닫도록 가르쳐야 한다. 안가르쳤다면 너무 큰 실책이다!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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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

위키백과에 따르면,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는 위상수학적인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도형으로서 비가향적(non-orientable)이다. [...] 종이 띠를 절반 만큼 비틀어 끝을 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어느 띠의 한 쪽은 희고 다른 쪽은 검다고 하자. 또 그 띠의 한 가장자리는 붉고 다른 쪽은 푸르다고 하자. 그리고 그 띠의 두 끝을 180도 엇갈리게 비틀어 이으면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이같은 띠는 정적인 관점에서 "안팎의 구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동적인 관점에서 안팎, 흑백 또는 홍청이 태극의 음양처럼 순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뫼비우스의 띠는 태극의 위상수학적 표현이다. 나아가서, 이 띠는 밤낮, 사계절, 엔진 사이클, 대화 등 모든 동적 순환운동을 표현한다.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가 
비례 관계라는 비리얼 정리를 

은하에 적용한 프리츠 츠비키  
질량결손 매울 암흑물질 가정!
 
1933년 

비리얼 정리가 우주적 허공에 
적용될 수있나 밝히기 어렵다!

전자기파 측정 불가능 하다면 
과학적 가설의 지위가 불안정!

과학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중  
입증 불가능한 가설은 비과학!

우주의 기본은 우주의 음양론  
우주의 균형은 작용과 반작용 

질량의 결손은 놔둬선 안된다 
우주는 이것을 매우려 들꺼다!
 
그것이 반드시 암흑 물질이든 
아니든 상관할 필요가 없나니  

우주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