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자들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2016, 새물결플러스, isbn 9791186409558) 요약
증보판 서문
편집창조론에 대한 여론
편집- 2005년 갤럽 조사. 53% 미국인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성경에서 정확히 묘사하는 방식대로 현재의 형태를 창조하셨다"고 믿음. 65.5%가 창조론이 결정적이거나 있을 법한 사실로 간주.
- 2005년 뉴스위크 조사. 80%의 미국인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음.
- Pew Research Center. "미국인의 2/3이 공립학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 고등학교 생물 교사 상당수가 창조론을 지지.(일리노이 30%, 오하이오 38%, 켄터키 69%)
- 1990년대 미국과학교육센터(National Center for Science Education, NCSE), '대학 이전의 고등학교 교육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학교에, 특히 학교 관리자들 중 얼마나 많은 공식적인 반진화론자들이 있는지"에 대해 놀랄 것'. 1992년, '진화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공격이 "날카롭게 상승했다"' 1990년대 논쟁이 많은 주로 퍼짐.[1] 이때는 아직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개념이 나타나기 전.
중요한 결정들
편집- 1987년 미국 대법원 판결에 의해 공립학교 교육과정에 창조론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초판 서문
편집- 1859년 «종의 기원»은 출간 후 영미 과학자들 대부분, 대서양 양안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우호적인 평을 받음
- 19세기 말 진화의 개념이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에게도 전파됨. 그러나 창조론은 소멸되지 않음.
- 1920년대, 1960년대 이후 진화론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이 생김.
- w: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주 1]: 모세오경의 날들을 지질학적 시대로 해석. 아담과 하와의 기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에서 생물 진화 가능성 허용.
- 아칸소, 루이지애나에서는 창조론, 진화론을 똑같이 교육하는 법안을 만듦. 하지만 위헌 판결. 이후에도 창조론 운동은 계속됨.
- 1960년대 초부터는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이 등장.
창조론의 주요한 개념들
편집-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창세기 1장의 날들이 지구 역사의 상당히 긴 시대를 표현한다고 해석하는 이론[3]
- 매우 오래전 물질, 생명 창조(1일째 물질, 3일째 생명창조)
- 4-5일에 화석 형성
- 6일에 인간 창조
- 빙하기(?)에 노아 홍수(지역적 홍수로 추정)
- 옹호자: JW 도슨, w: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w: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WB 라일리
- 간격 이론(파괴/회복 이론)
- 매우 오래전 물질, 생명 창조
- 이후 오랜 기간동안 여러 번의 대격변과 창조가 일어남
- 주전 4004년, 6일째 에덴동산의 회복(아담과 하와 창조)
- 주전 2348년 지역적인 노아의 홍수
- 옹호자: w:C. I. 스코필드, H. 림머, LA 히글리, J. 스왜거트
- 홍수지질학 또는 w:창조과학
- 생명 없는 지구로 출발. 오랜 시간이 지남.
- 주전 4,000-8,000년, 6일째 에덴동산에서 물질, 생명, 인간 창조
- 주전 3,000년 경 노아 홍수(화석 형성)
- 옹호자: w:엘런 화이트, w: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 w:헨리 모리스, JM 휘트컴
다윈 시대의 창조론
편집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이후는 과학계, 종교계 모두 진화론을 받아들임. 그때 당시(19세기)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과학적 창조론자들
편집- 창조론 진영의 변화: w:루이 아가시→존 맥크래디(John McCrady, 1831-1881)→아놀드 기요(Arnold Guyot), 존 윌리엄 도슨(John William Dawson)
- w:제임스 드와이트 대너 & 도슨: 창세기 1장의 '날'을 우주적 역사의 신기원으로 해석, 지구의 발달사를 모세오경의 창조 사건 순서와 연관시켰음. 정통 기독교인들이 널리 수용.
- 기요: 아가시와 다르게 특별 창조 횟수를 최소화. 하느님이 정한 자연법칙에 따라 종 분화 주장.[6] 기요는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였다.(점진적 창조론자 (progressive creationist))[7]
- 도슨: 19세기 말 자주 인용되는 반 진화론 서적의 저자. 지질학자. 1880년대 미국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영국과학발전협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회장. 영국 지질학자 w:찰스 라이엘의 제자. 특별 창조론자였지만, 성경적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진화와 설계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진화에 대한 반감이 줄어듦. 창조의 6일이 아주 긴 기간이라고 생각. 지구는 매우 오래됐다. 노아 홍수는 지역적.[8]
- 이 시기 과학계 에는 의외로 창조론자, 진화론자의 생각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았음.[9]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계에서도 젊은 지구설을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다.[10]
- 에드워드 히치콕(Edward Hitchcock, 1793-1864): 미국의 지질학자, w:회중교회 목사. 지구의 오랜 나이, 국지적 홍수, 특정한 종에 한정된 창조를 인정하는 데 신학적인 모순을 느끼지 못함. 생물 진화를 거부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보다 과학적인 이유에서 거부함.[11]
- 에녹 피치 버(Enoch Fitch Burr, 1818-1907): "진화에 반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 중 한 사람". 수학, 천문학 지식. 종교의 과학적 증거에 대해 가르침. 지구 역사를 문자적 6일에 짜맞추려 하지 않았고, 지질시대 증거도 부인하지 않음. 주로 다윈의 종의 기원에 관한 특별한 이론보다 자연 법칙에 의한 진화라는 전체 개념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 조지 암스트롱(George D. Armstrong, 1813-1899): 과학적 근거라고 내세운 단호한 진화론 비판자. 화학, 지질학. 남장로교. 기요와 비슷한 논리(특별창조 옹호. 창세기에 대한 유연한 해석 주장. 진화와 창조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12])
- 허버트 모리스(Herbert W. Morris, 1818-1897): 수학 교수. 문자적인 창조 강조. 인간의 진화는 성경의 증거, 과학적 사실과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 아예 지질학을 배제하진 않음. 노아방주는 보편적이라 해석.
성직자 직분을 가진 창조론자들
편집- 1870년대 중반 이전: 성직자들은 다윈의 이론이 아가시 등에 의해 부정되었다고 보고 관심을 갖지 않음.
- 187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대다수 동식물학자가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인 후. 과학적 모순점을 지적하기보다 기독교 교리와의 불일치를 강조하여 다윈 이론의 취약성을 주장함. 이 소수의 성직자들이 다윈 이론을 거부한 이유는 인간 기원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여전히 믿으면서 동시에 진화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렇다고 지구 생명의 역사를 6천년으로 압축하거나 화석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대홍수를 끌어들인 사람은 없었다. 창조론자들조차 지구의 오랜 나이를 인정. 창세기의 '날들'을 지질 시대로 해석하는 기요와 w:제임스 드와이트 대너의 설명을 받아들임.
- 드 위트 탤머지(T. De Witt Talmage, 1832-1902): 장로교 목사.
-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프린스턴 신학교. 제자는 루이스 대브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
- w:전천년주의자들은 진화론에 강력히 반대함. w:성서 무오설[13]
-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 복음전도자.
- H. L. 헤이스팅스
- 로버트 패터슨(Robert Patterson, 1821-1885): 아일랜드 태생 캘리포니아 이스트 오클랜드 장로교회 목사.
- 헤이스팅스, 로버트 패터슨은 에덴 창조 이전의 오랜 시간을 인정. 지질학적 연구 허용.
- 루터 타운센드(Luther T. Townsend, 1838-1922): 감리교 목사. 저술가. 다트머스 대학, 앤도버 신학교 졸업. 보스턴 신학교 교수. 지질학자들이 발견한 증거들을 성경과 조화시키려 함. 날-시대 이론.
- 알렉산더 패터슨(Alexander Patterson): 장로교 w:복음주의자. 헤이스팅스, 타운센드처럼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역사적인 틈새가 있다고 믿었음. 이 부분이 지질학에서 말하는 것이라 봄. 문자적인 성경 해석. 그러나 창조의 6일을 짧은 날들로 해석하거나, 홍수의 보편성을 주장하진 않음.
보수적 창조론자들
편집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따로 글을 쓰거나 하진 않았지만, 젊은 지구,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믿음. 극소수만이 화석 기록을 홍수를 통해 설명하려 함.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기독교적 다윈주의자에서 근본주의자로
편집근본주의 논쟁 속의 창조론
편집학계에서만 진화론 논쟁이 되었을 때와 달리 논쟁이 공적 영역으로 퍼지자 창조론자들이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됨.
- 20세기 초 독일 생물학자들의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이 커짐[15]
- 미국에서도 독일의 상황을 예의주시.
초기 근본주의
편집보수주의 기독교계는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주 2]이 정통주의 신앙을 위협한다고 봄.
- A. C. Dixon: 전투적 복음주의자. 원시 유인원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이론에 분개.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함.
- 루벤 토리(Reuben A. Torrey, 1856-1928): 딕슨보다 온건파. w:제임스 드와이트 대너(James Dwight Dana)의 제자. 과학적인 이유로 진화에 반대. 그러나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으면서도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함.
- 이 당시 근본주의는 진화론을 싫어했지만, 나중의 근본주의와 다르게 본격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하진 않음.
- 진화론은 학교와 교회 안으로 빠르게 확산.[16] 침례교, 보수적인 미국 남부에서도 교회 관련 다수 대학들이 진화론을 수십년 간 가르침. 그러나 남부에서의 학문적 성장은 더뎠다.[17] 세계 1차 대전 이후에는 남부 근본주의자들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림.[18]
반진화론 운동
편집- 1920년대 반진화론 법: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기 위한 법. 켄터키 주, 등 20개 이상의 주에서 논의. 실제로 통과된 주는 테네시, 미시시피, 아칸소 주. 오클라호마 주에서는 진화론 교과서 채택을 금지. 플로리다는 다윈주의 교육을 "부적절하고 체제 전복적인 교육으로 봄.
- 주요 인물: w: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 브라이언의 활동에 동참한 사람들: 미국 전역 각계각층. 고학력자는 많지 않았으나, 대다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남부에서 브라이언의 지지가 많았다. 교회 안에서의 영향력은 측정하기 힘듦. 모든 근본주의자들이 창조론자인 건 아니었고, 많은 창조론자들이 반진화론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음.
- 1929년 개신교 목사 700명에 대한 설문("당신은 세상의 창조가 창세기에 기록된 방식과 시간에 따라 발생했다고 믿습니까?"): 긍정으로 답한 비율은 다음과 같다. 이 조사는 설문 문장을 목사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얼마나 실제 운동에 반영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예컨대 전천년설 신봉자들은 자신들 주위에서 반진화론 운동을 하지 않음.[19]
- 침례교, 장로교인들이 진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함.[19] 침례교 또는 미국 남부의 생물학 교수 또는 신학 교수들이 진화론에 대해 우호적이면 해임하거나 해임 압력을 넣는 등의 활동을 함. 장로교는 창조론 운동에 기여했지만, 진화론자들도 포용. w:유물론적 진화론만 타도.[20]
- 가톨릭은 의견이 나뉘었으나, 이 주제에 관련된 법을 만들진 않음[21]
- 여러 반진화론 단체가 생겼다가 사라짐. 대표적인 단체: 프레드 베넷(Fred E. Bennett)의 미국과학재단(American Science Foundation)[22]
과학의 정의와 과학자들 수
편집창조론자들은 과학의 사전적 정의와 w:프랜시스 베이컨의 w:경험주의를 조합하여 과학의 정의를 임의로 좁혔고, 진화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
타운센드는 진화에 반대하는 과학자 명단을 만들었는데, 몇몇 인물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며, 몇 명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몇몇은 그렇게 과학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던 등 문제가 많았다. 과학자들은 이런 시도를 반박함.
브라이언 시대의 과학적 창조론자들
편집창조론자들에겐 과학자가 없었다. 과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본업이 종교쪽이었음.
- 대표적인 인물: H. 림머. 읽어보면 좀 많이 재밌다.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와 새로운 대격변설
편집- 주요 사건: w:스콥스 재판
- 주요 인물: w: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
- 주요 조직: w: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 스콥스 재판 이후 프라이스는 근본주의 운동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 프라이스가 신뢰한 세 사람: 로마 가톨릭의 오툴(O'Toole), 장로교의 플로이드 해밀턴(Floyd E. Hamilton), 루터교의 바이런 넬슨(Byron C. Nelson, 1893-1972)
- 오툴: «진화 반대론»(The Case against Evolution). 프라이스를 책에서 인용하긴 했으나, 지층들의 상대적 연대를 결정하기 위해 화석 증거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었음. 지질학적 논증보다 생물학적 논증에 더 관심을 가졌다. 대홍수와 그 결과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말하지 않음.
- 해밀턴: «기독교 신앙의 기초»(The basis of Christian Faith, 1927), «진화론적 믿음의 기초»(The Basis of Evolutionary Faith, 1931)에서 프라이스의 이론을 특징적으로 설명. 홍수지질학을 상세히 논의. 그러나 특별창조가 24시간의 날들에 걸쳐 일어났는지 6번의 시대에 걸쳐 일어난 것인지 말하기 거부함.[23]
- 넬슨: 프라이스의 견해 많이 따름.
종교와 과학 협회
편집더들리 조지프 휘트니(Dudly Joseph Whitney, 1883-1964): 1935년 프라이스와[24] 종교와 과학 협회를 만듦. 프라이스 홍수지질학 지지하게 됨.[25] 다른 기독교 창조론자나 복음주의자를 설득하러 다님. 여전히 반진화론 운동을 함.
- 근본주의자들은 지역사회, 과학계를 자신의 편으로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학교, 대안 단체, 잡지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함. 기반 다지기.
- 휘트니와 프라이스가 소집한 이사회는 다양한 종파, 다양한 창조론자들로 구성되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음. 프라이스는 홍수지질학을 따르도록 그들을 설득하려 함.
종교와 과학 협회는 1937년 자멸했다.[26]
홍수지질학회
편집종교와 과학협회의 배턴을 이어받을 협회가 홍수지질학회. 대중에게 더 친숙한 설명을 하는 것도 목표로 추가됨. 벤자민 알렌(Benjamin Flanklin Allen, 1885-1960), 프라이스(프라이스는 노년기였다) 대부분이 안식교인이었음. 안식교 모임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종파 사람들도 초대함. 그러나 다시 내분이 일어났다. 안식교의 목적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프라이스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겼다.(클락, 알렌)
영국의 복음주의자들과 진화
편집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진화와 공존하는 방법을 선택함. 1930년대가 되어서야 진화반대운동(Evolution Protest Movement, EPM)이라는 단체를 조직. 프라이스는 영국에도 가서 자신의 이론을 전파하려했으나, 잘 되지 않음.
- 진화반대운동 참여자: w:존 앰브로즈 플레밍, 버나드 애크워스(Bernard Acworth, 1885-1963), 더글라스 디워(Douglas Dewar)
- 애크워스: 영국 해군대학 출신. 잠수함 승무원. 해군 은퇴 후 프리랜서 언론인(해군 통신원). «속박»(Bondage)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 상대성 이론, 공군력에 대한 비판을 함. 생물학자들이 철새의 이동을 통해 진화의 증거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착각해 새들에 대해 연구함. 과학 학회들은 이 아이디어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음.[27]
- 더글라스 디워: 변호인, 아마추어 조류학자. 1895년 자연과학 최우등 학사학위. 인도 공무원 일하는 동안 동물학을 취미로 연구함. 인도의 새들에 관한 전문가.
- 공저로 참여한 «종의 형성»(The Making of Species)가 있는데, 이 책의 공저자들은 w:용불용설이 w:자연선택에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에 대해 고민함. 이 책은 진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책이었음.
- 은퇴 후 영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진화에 비판적이게 됨. 진화론에 백인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걱정함. 증거없이 제안되었다고 생각하는 진화론의 주장 목록을 정리.
- 화석 기록에서 전이가 흔하지 않다는 점, "유기체의 새로운 유형을 유발할 능력을 갖고 있는 자연의 힘들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영향을 받아 진화론에 의해 보충되는 특별창조"를 주장함.
- 자신의 책이 종교 색채가 없는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길 바랬음. 성경이 틀릴 수 없다고 생각(근본주의)
- 간격이론과 비슷한 것을 주장함. 창세기 1장 1, 2절 사이가 아닌 1, 2장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보고 이때 화석이 생겼다고 함. 1940년대에 단 한번의 여러 종 창조를 지지한다고 밝힘.
- 그의 책은 주목받지 못했다. 디워는 프라이스를 지지했다. 다만 새로운 격변설의 몇 가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는데, 첫째는 두께가 300m나 되는 화석의 모암이 어떻게 몇 달만에 놓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둘째는 지질주상도(geological column)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죽은 동물의 사체가 무게에 따라 다른 층에서 퇴적되었다고 생각했다.
- 과학 저널에 기고하려 했으나, 거절당함. 이 경험을 통해 과학자들이 일부러 창조론자들의 논문을 막는다는 의심을 품게 됨.[28] 이 이유로 1932년 진화반대운동을 설립한다.
- 영국 창조론자들은 홍수지질학을 받아들이라는 미국 홍수지질학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디워는 당시 과학 지식이 창조론이 맞는지 진화가 맞는지 결론내리기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
- 학교를 통제하려는 미국 창조론자들과 달리 영국 창조론자들은 헌법에 의한 지배가 약했고, 방송을 통제하는 게 더 효과적으로 봄.
로버트 클락과 빅토리아 연구소
편집EPM은 대부분 창조론 신봉자였으나, 로버트 클락과 같은 예외도 있었다. 보편적 복음주의자. 그리스도의 재림 믿음. 종말론적 예언에 대한 책을 씀. 진화론자에 대해 어리석다고 생각했으나,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다면 진화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음. 6일 창조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계시에 불과하다고 생각. 자유롭게 과학을 따름. 오랜지구, 국지적 홍수 옹호.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 설계가 오직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봄. 홍수지질학에 대해 반대. 그렇다고 진화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음. 엔트로피 법칙을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활용함.(고립계 개념 오해) (참고: w:창조과학#생물의 진화 부정) "현대 창조론의 양심과 같은 역할을 했다" - 넘버스의 평.
북미의 복음주의자들과 진화
편집1925년에서 1950년 사이 조직적인 창조론 운동은 거의 없었음.(종교와 과학협회(RSA), 홍수지질학회(DGS)뿐) 1941년 과학과 종교에 대한 기독교 증언의 질에 걱정하는 복음주의 과학자들이 미국과학자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 창립. 진화론자와 직접 대립 피하고, 창조론의 주장 점검. ASA가 엄격한 창조론에서 점진적 창조론,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주제를 옮김에 따라 다른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진화론쪽으로 움직임. 이에 따라 1960년대 보수적 창조론자들이 반격을 시작함.
미국과학자연맹
편집- 멤버: 어윈 문(Irwin A. Moon, 1907-1986), 크리스천 리폼드 교단(CRC) 소속 칼빈대학 생물학자 반 헤이츠마(John P. van Haitsma, 1884-1965), 패서디나 시립대학 회중교회 소속 수학자 피터 스토너(Peter W. Stoner), 침례교 공업화학자 어빙 카우퍼스웨이트(Irving A. Cowperthwaite, 1904-1999), 침례교 화학자 러셀 스터지스(Russel D. Sturgis), 침례교 전기공학자 앨턴 애버리스트(F. Alton Everest)
- 에버리스트: 지도자. 문이 무디 과학 연구소(Moody Institute of Science)를 설립하는 걸 도움. 1970년까지 회원으로 있었음. 보수적인 침례교. 스코필드 성경을 좋아함. 의사 아서 브라운(Arthur I. Brown)을 좋아함. 사교력과 끈기로 10년간 ASA 회원 215명을 모집함.(절반 이상은 메노파, 침례교, 장로교. 대개 중부 애틀란타 또는 중서부 주에 살았음) 1961년 ASA 회원수 860명. 홍수지질학회(DGS)와 연합하는 것을 공손히 거절. 제휴 관계만 유지함. 최대한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안식교인을 회원으로 받은 사례는 첫 10년 간 2명뿐이었다.
로렌스 컬프와 홍수지질학에 대한 비판
편집미국과학자연맹이 고민했던 홍수지질학회와의 연대 문제는 로렌스 컬프(J. Laurence Kulp, 1921-)라는 지구화학자가 해결했다. 지질학 교육을 받은 미국 초기 근본주의자. 처음에 문자적 6일 창조, 보편적 홍수를 지지.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간격 이론으로 넘어감. 휘튼 대학 입학 후 날-시대 이론으로 옮김. 그러나 생물 종, 인류의 특별 창조 계속해서 지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선구자. 컬프는 공개 토론을 통해 성경의 내용과 지질학이 상충하지 않음을 보였고, 이것을 받아들인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컬프의 이론을 따랐다.[29] 컬프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 홍수지질학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널리 퍼져왔는데 그 이유는 정식 교육을 받은 기독교 지질학자가 없었기 때문
- 홍수지질학자들이 범하는 네 가지 근본 오류는 다음과 같다.
- 역사적 지질학을 진화와 동일시하는 것
- 지구상의 생명이 단지 수천년 동안만 존재해왔고 보고 반드시 홍수가 지질학적 지층을 설명해야한다고 가정하는 것
- 바위가 형성될 때의 물리학적인 그리고 "화학적인 조건"을 오해하는 것
- 그들의 가설을 뿌리째 뒤집는 방사능 연대측정 방법과 관계된 최근의 발견들을 무시하는 것
1949년의 논문을 통해 홍수지질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신뢰가 많이 없어짐.[30]
점진적 창조 또는 유신론적 진화?
편집ASA는 반진화론을 버리고 진화에 대해 인정하면서 신학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학문적인 단체로 거듭나기로 함. 이 와중에 종종 의견 불일치가 있었음. ASA와 가장 큰 관련이 있던 휘튼 대학은 많은 공격을 받음
휘트컴, 모리스 그리고 «창세기의 홍수»
편집근데 유신진화론하고 점진적 창조론하고 헷갈리네. 정리가 필요할 듯. 이 책 읽고 나서 창조주의의 주된 이론들(날-시대 이론, 격변 이론, 점진적 창조론, 유신창조론), 그리고 창조과학(홍수지질학)만 구분해도 본전을 뽑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점진적 창조와 헷갈리는 유신창조론에 대해서는 w:유신창조론 참고.
- 점진적 창조론: 젊은 지구, 보편적 홍수, 인류 최근 등장 가능성을 폐기한 이론.[31]
점진적 창조라는 생각은 하나님이 지질학적 기록 사이의 갭을 연결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개입하시는 것을 허용한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새로운 '근본적인 종들'(root-species)을 창조하신 것이 되고, 그것들은 이후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종들로 진화하거나 파생되었다고 이해된다. 수백만 년 전에 걸쳐 펼쳐진 이런 과정 전체는 창조 사역의 정점을 이루는 인간들에게 적절한 고향을 마련해주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 445쪽
광대한 숲들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한 것은 석탄을 만들기 위함이다. 석탄은 자연 안에 인위적으로 삽입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 과정을 통하여 등장한다. 수백만의 바다 생물들이 태어났다가 썩은 것은 석유를 만들기 위함이다. 지구의 표면은 비바람에 풍화되어 숲들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어떤 때는 큰 생물인 공룡들이 생기기도 했다. 동물들의 형태의 복잡성이 증가했다. 마침내 모든 강이 계획된 경로대로 흐르기를 마쳤을 때, 모든 산들이 제자리에 놓였을 때, 지상의 모든 생물들이 창조의 청사진과 일치하게 되었을 때, 그때 모든 창조가 고대하던 존재가 만들어졌는데, 그 존재는 인간이었다. 오직 그의 안에만 하나님의 숨이 있다. 이것은 진화가 아니다. 이것은 점진적 창조다
— 445-446쪽
- w:존 휘트컴 주니어: 창조과학론자
- w:헨리 모리스
- w:창조과학#미국: 역사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이 글도 참조.
휘트컴과 모리스의 «창세기의 홍수»가 나오고 나서 엄청난 파장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창조론의 날-시대 이론이나 파괴-회복 이론 등을 믿는다고 했다. 홍수지질학에서는 그 이론들을 부정하는데도 말이다.
휘트컴과 모리스는 지질학과 홍수지질학의 교착상태 원인을 우주관의 탓으로 돌렸다. 즉 홍수지질학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기반으로 해석하고, 지질학자들은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의견충돌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32]
창조연구회
편집- 주요 인물: w:월터 램머츠
- 최초 운영위원회 구성
- 종파
- 루터교 6
- 침례교 6(남침례교 4, 일반 1, 독립파 1)
- 안식교 2
- 개혁주의 장로교 1
- 기독교 장로교 1
- 감리교 1
- 형제 교회 1
- 지역
- 중서부 12(미시간 9)
- 남서부 4
- 캘리포니아 1
- 버지니아 1
- 학과(중복 있음)
- 생물학 박사 5
- 생화학 박사 3
- 생물학 석사 2
- 지구과학 1
- 직업
- 교회 관련 대학 7
- 주립 교육기관 5
- 산업체, 정부, 자영업 나머지
- 종파
- 3년만에 680명 회원이 모였으나, 과학관련 자격증을 가진 투표권자는 200명, 200명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60명이었다.
창조연구회는 주로 교육, 연구, 출판에 집중했다.
초기에 시간에 대한 논쟁때문에 분열이 있었다. 누군가는 w:오랜 지구 창조설을 믿었고, 누군가는 w:젊은 지구 창조설을 믿었으며, 우주가 젊은가 오래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33] w: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 누군가는 수용했고, 누군가는 반대했다.[34] 위원회는 이들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처음에 안식교인들이 연구회를 점령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렸고, 대부분 미주리 루터교인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운영위원회 18석 중 6석을 이들이 차지했고 의장, 계간지 편집자, 회계 담당자가 모두 루터교인이었다.[35]
교과서 프로젝트
편집w:스콥스 재판과 소련의 w:스푸트니크 쇼크의 영향으로 생물학 교과서가 진화만 다루는 것으로 노선이 변경됨. 이에 창조론자들은 강력히 반발. 이들은 대신할 교과서를 모색함.[36] «생물학: 복잡성 안에서 질서 찾기»(Biology: A Search for Order in Complexity)를 내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한편 공립학교에서 그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거의 없었다. 인디애나 주 법원은 이 책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37]
프라이스의 이론을 창조과학 또는 과학적 창조론과 동일시했는데, 이는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 문화의 영향과 법적, 교육적, 과학적 대응을 하기 위해 성경적 창조론과 차별화하기 위함이었다.[38]
- 중요한 개념: 창조과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논쟁이 벌어짐. w:반증 가능성에 대해 이해해야 함. 종교인가? 과학인가?
창조과학과 과학적 창조론
편집- (사실상) 창조과학 = 과학적 창조론 = 홍수 지질학(flood geology)[39]
1981년 미국 아칸소 주의 정의
창조과학은 다음과 같은 과학적 증거들 및 관련된 추론들을 포함한다. 1. 우주, 에너지, 그리고 생명의 무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창조. 2. 단 하나의 유기체로부터 생물의 모든 종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불충분성. 3. 시초에 창조된 식물과 동물의 종류들이라는 고정된 경계 내부에서만 가능한 변화. 4. 인간과 원숭이의 분리된 기원. 5. 전지구적 홍수발생을 포함한 대격변에 의한 지구 지질학의 설명. 6.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지구와 생물 종들의 시작.
— 책 26쪽
창조과학자들은 지상 생명체 역사를 1만 년 이내로 본다. 대부분 화석 기록이 노아의 홍수에 의한 짧은 기간에 형성되었다고 봄. 다른 창조론자들은 수백만 년에 걸쳐 동식물이 살았다고 봄.[40]
- 창조과학에서 다루는 주제의 중요도
- 지질학 > 생물학
- 노아 홍수 > 아담의 창조
- 대표적인 인물, 책
- w: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 «새로운 지질학»(New Geology, 1923)
- w:존 휘트컴 주니어(John C. Whitcomb, Jr.), w: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창세기의 홍수»(Genesis Flood, 1961)
- 토머스 반즈(Thomas G. Barnes): 지구 자기장 붕괴 가설
- 지구 자기장의 기하급수적 붕괴 가정. 시간에 따른 변동 무시 후, 지구 자기장 생명이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아닌 수천년으로 계산되어야 한다고 주장.
- 과거에 보다 강력한 자기장이 지구를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했고 탄소-14의 양이 낮은 수준으로 생성되게 했기 때문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
기만과 차별
편집과학계는 창조과학을 온건하게 또는 매우 강력하게 비판함. 그런데 의외로 창조과학 위원회에서는 어설픈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쓴 창조과학 논문들을 못마땅해했음. 창조과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창조과학자들 자신들로부터 나옴.
- 클리포드 버딕(Clifford L. Burdick): 창조연구회 가장 활발한 연구자. 애리조나 잡역부. 지질학자로서 자문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감. 벤처 광산업.
- 박사 학위를 얻기 위해 여러 대학들을 전전했으나 여러 번 실패하고, 마침내 가짜 학위를 만들었다가 램머츠에게 걸림. 그 외에도 연구에서의 거짓말, 부주의로 신뢰를 잃어버림. 꽃가루 연구 또는 공룡 발자국 연구 등.
- 램머츠는 버딕이 유명해지기 위해 욕심이 앞서서 자꾸 오류를 만들어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함.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자신이 창조과학을 믿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위를 받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이거나 자신의 조작이 들어간 것들이 대다수였다.
홍수지질학자들이 없는 홍수지질학
편집과학적 창조론에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는 홍수지질학을 지지하는 지질학자가 없다는 것이다.[44] 이렇게 된 까닭은 지질학을 전공하는 경우 너무 기존 지질학의 신뢰성을 입증할만한 증거들이 많아서 학위를 따기 위해 홍수지질학을 포기하거나, 아예 지질학 학위를 포기하거나 해야했기 때문. 생물학 전공은 그런 증거들을 쉽게 회피할 수 있었던 반면 지질학 전공을 하려면 그게 어려웠음.[45]
창조연구소들
편집모리스는 창조과학연구센터(Creation Science Research Center, CSRC)를 설립. 침례교 취향.[46] 단체의 목표는
- 1-6학년의 창조론 커리큘럼 마련. 창조연구회(CRS)가 만든 고등학생 교재 제공
- 홍수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연구
- 라디오, 세미나, 문헌 등 확장 사역 지원
한편 CSRC 설립에 함께했던 시그레이브스 모자는 모리스와 다르게 정치적이고 선전 활동에 중심을 둔 전략을 더 좋아했다. 내용도 엉성하고 비싼 책들을 만들기 시작하다가 다른 시설을 만듦. 이로 인해 빚이 생기고, 재정적으로 어려워짐. CSRC는 창조과학의 변두리로 밀려나 해체.[47]
모리스는 남은 멤버들로 다시 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CR) 설립. 저예산. 활동 확연히 줄어듦. 주로 문헌을 찾는데 시간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설립에 참여한 기쉬는 마찬가지로 연구보다 선전 활동에 더 관심이 있었다. 빈약한 연구 기간에도 책을 다량으로 만들어냄. 세계 여러 나라들에 «과학적» 창조론이 보급되기도 함. 진화론자들과의 토론 역시 창조과학을 홍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모리스는 온건한 방법으로, 기쉬는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창조과학을 홍보함. 토론은 효과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창조과학에 관심을 가짐.
새로운 대학원을 세워 학문적으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대학원생들을 받음. 네 개의 과목이 있었고, 이 중 슬러셔가 맡은 과목도 있었다. 그가 가진 학위는 석사 학위였기 때문에 그는 캘리포니아의 컬럼비아퍼시픽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그런데 이 학교는 1년만에 박사학위를 딸 수 있는 방송통신대학이었음. 이 와중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감사가 시작됐고, 창조과학 대학원은 열악한 교육 환경과 검증되지 않은 교수진의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0년에 주 정부가 학교 허가를 취소했고, 2년 뒤에나 다시 회복되었다. 이런 사건을 보고 모리스와 ICR 동료들은 종교적인 차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여겼다.
지구과학연구소
편집넉넉한 재정상태의 지구과학 연구소(Geoscience Research Institute, GRI)도 있었음. 대학원, 연구실 등을 충분히 갖춤.
- 마쉬: 성경과 화이트의 영감, 안식교회의 해석을 기원에 관한 모든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자.
- 헤어, 리틀랜드: 창조와 홍수에 관한 성경적, 예언자적 설명들을 과학적 증거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싶다 함. 오래된 지구(수십억 년의 나이). 홍수에 의해 퇴적된 화석 수를 줄여야 된다고 봄. 여기에 마쉬는 분노를 느낌.
리틀랜드는 1962년 안식교 그룹 안에서 자신의 견해를 논문을 통해 밝힘. 퇴적된 지층에 대한 연구는 창세기 홍수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있었던 대격변이 지형을 조각했음을 가리킨다고 함. 홍수지질학을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에 대해 당혹과 불신만을 일으킬 뿐"이라고 함.
마쉬가 GRI에서 합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김. 연구소 운영위원회에 리틀랜드와 헤어는 지질학, 자신은 진화 대 특별창조 분야를 맡아 연구 영역을 분리해줄 것을 요청. 또한 각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개별적으로 위원회에 보고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함. 그러나 동료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겠다는 마쉬의 결심이 사라짐. 특별 계시 >> 자연 계시
1963년 GRI 본부 요원들 간 관계는 더욱 악화됨. 리틀랜드는 마쉬가 "성경과 예언의 영을 지킨다는 순교자가 되게 하는" 발판이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워 함. 모리스가 안식교인처럼 말했다고 생각하던 마쉬는 <<창세기의 홍수>>를 널리 홍보하고 다님. 그러나 리틀랜드는 사이비 과학자의 책이라고 봄. 리틀랜드와 헤어가 전향함에 따라 램머츠는 크게 실망.
헤어는 바다 조개 안의 아미노산 비율에 대해 연구하면서 생명체가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음을 봄. 그리고 결국 카네기 연구소로 가서 국제적인 지구화학자가 됨.[48]
마쉬는 결국에 좌천됨.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데 마쉬는 이게 리틀랜드의 수작 때문이라고 여김.[49]
리틀랜드는 두 명의 후배를 선발. 해럴드 제임스(Harold E. James, Jr., 1936-), 에드워드 루진빌(Edward N. Lugenbeal) 둘 다 리틀랜드처럼 안식교인.
- 해럴드 제임스: 프린스턴 지질학 박사.
- 에드워드 루진빌: 위스콘신 대학 선사 고고학.
리틀랜드는 클락의 옛 제자 애리얼 로스(Ariel A. Roth, 1927-)에게 파트타임 자리를 줌.
- 애리얼 로스: 미시간 대 기생충학 박사. 지질학자가 될 계획.
제임스와 루진빌은 리틀랜드의 개혁 프로그램을 지지. 로스와 커핀(헤어 대신)은 홍수지질학을 고수.[50]
1960년대 말 커핀은 로스, 클락 등의 지원을 받아 <<창조, 우연인가 설계인가>>(Creation-Accident or Design?)라는 책 발행. 프라이스, 성경, 화이트의 생각을 따름. 홍수 이후의 빙하, 정돈된 지질주상도. 리틀랜드를 따른 부분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화석 작용에 대한 설명. 화이트와 약간 달랐던 건 지구 역사가 6천 년 조금 위라는 것.[51]
1970년 리틀랜드는 <<자연 안에서 의미 찾기: 창조와 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A Search for Meaning in Nature: A New Look at Creation and Evolution)을 출판. 진화론을 비판하거나, 화석들을 홍수 모델에 맞추려고 하기보다 자연 안에서 설계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집중 조명. 하나님의 창조가 사실들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이지만, 화석 기록은 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생명의 고대성. 지역적인 노아 홍수.
1966년 엄격한 교리주의자 로버트 피어슨(Robert H. Pierson, 1911-1989)이 새로운 총회장이 되고 나서 기원 연구에 대한 새 가이드 라인이 생김. 그가 원했던 건 연구가 아니라 호교론이었음.
진화론 지지자들과의 논쟁에서 우리는 분명한 관점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것은 성경과 예언의 영은 시험받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결국 리틀랜드는 1971년 GRI 연구소장을 사임. GRI는 신속히 로버트 피어슨의 생각대로 흘러감. 물리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E. Brown, 1915-)은 지구의 생명이 "6번의 연속된 회전 안에 생성되었고", 지구는 "창세기 6-8장이 그리는 보편적 파멸(노아 홍수 - 편집자 주)"을 경험했으며, 지구상 생명은 1만 년 미만의 역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연구소 내에서 잘 받아들여졌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은 모세와 엘렌 화이트가 주는 증거와 모순되므로 거짓이라고 하였다. 지구의 원물질이 대략 수십 억 년 전 것임을 가리키는 방사능 시간 기록계 증거를 수용하기 위해 '계시적인 침묵'을 이용.
교회 안의 창조설
편집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외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을 믿었으나,(w:창조주의#창조주의를 믿는 사람들 참고) 그들 중 오랜 지구설 또는 젊은 지구설 등등 창조주의의 여러 가지 이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루터교회-미주리 노회
편집미주리 노회 루터교에서는 처음에 천동설을 지지할 만큼 엄청 보수적이었으나, 차츰 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됨. 이로 인해 분열이 일어났고, 이후 계속해서 창조론을 지지하고 있다.
창조, 진화, 그리고 성령의 종교
편집체험을 중시하는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창조론자들이 나왔다. w:나사렛 교회, w:하나님의 교회, w: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와 느슨한 관계만 유지하던 더들리 휘트니(Dudley Joseph Whitney), 존 무어(John N. Moore)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프라이스, 모리스의 대격변설과 거리를 두었다. 보수적인 웨슬리안 캠프의 반진화론자들은 구원을 창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
1961년 <<창세기의 홍수>>가 출판되었을 때 성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주목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아는 사람들은 은근히 책의 성공을 바람.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태도와 동일과정설을 비판하는 모습을 좋게 봄.
w:오순절 교회 평신도들 사이에선 창조과학이 유행함.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음.
말일 성도들
편집1935년에서 1973년까지 진화론을 부정하는 w:모르몬교 신도들은 36%에서 81%까지 급증. 프라이스의 영향력때문.
다른 개신교파들, 가톨릭교회, 그리고 유대인들
편집20세기 후반 50년간 엄격한 창조론을 여호와의 증인, 범세계적 하나님의 교회처럼 많이 진전시킨 교단은 없었음. 이 두 교파는 7일 안식교와 같은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교단임. (범세계적 하나님의 교회≠하나님의 교회) 그러나 이 두 교단은 홍수지질학을 받아들이지 않음.[52]
홍수지질학은 보수 개신교, 모르몬교 이외에는 거의 전파가 안 됨. 로마가톨릭은 겨우 몇 명만 창조론 동조.[53] 창조연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맹세한 사람만을 받았기 때문에 비 기독교도 창조론자들에게는 창조과학을 전파하지 않음.[54]
유대인들은 토라가 문자적 사실이라고 여겼으나, 과학적 창조론자들의 해석을 전혀 따르지 않음.
고향과 해외에서 약진하는 창조론
편집- 1960년대 초: 가장 보수적인 교회들 밖에선 거의 유행하지 못함.
-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캘리포니아 교과서 논쟁 전까진 창조론 운동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음.[55]
- 1970년대 말: 웬델 버드(Wendell R. Bird, 1954-)가 창조론을 공립학교 커리큘럼에 도입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 새로운 정치적 국면. 창조론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가르치는 것은 종교 수업을 금하는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자유로운 학습권을 침해한다. 가톨릭 신자 폴 엘웽거(Paul Ellwanger)가 주 입법기관에 청원. 아칸소, 루이지애나 주에서 승인. 20개 이상의 주는 승인 고려 중. 진화론자들은 대응을 시작. 진화에 대한 책자를 교육감, 선생님 등에 배포. 이와 비슷하게 창조론자들도 똑같이 책자 배포.
- 창조론자들은 주 의회, 연방법원에서의 패배 등을 경험하고 나서 1980년대 중반에 신문 머릿기사를 차지하는 입법 투쟁에서부터 선생님들과 교육위원회 위원들을 조용히 설득하는 방향으로 선회. 1987년 연방 대법원이 창조과학을 자발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하는 판결을 했다. 이후 공립학교 교사들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리노이 주의 30%, 켄터키 주의 69%에 이르기까지 창조론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영국에서의 창조론
편집- 1960년대 초: 창조론이 힘없는 상태. 그러다가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 등의 지도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반격을 시작.
- 1977년 성경적 창조회(Biblical Creation Society, BCS): 스코틀랜드 성직자 나이젤 드 캐머런(Nigel M. de S. Cameron)과 복음주의 학생들이 결성. 보수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신진화론이 퍼지는 것을 걱정. 성경의 관점에서 과학적 데이터를 검증하는 휘트컴과 모리스의 방법에서 영감을 얻음. 그러나 약간 달랐음. 젊은 지구 신봉자만 회원으로 받지 않음. 1980년대 초 17명 이사진 중 11명은 개혁주의 침례교, 3명은 스코틀랜드 교회, 3명은 각각 장로교, 형제회, 오순절 교회 출신.
- 주요 인물
- 창조과학자 앤드루스(E. H. Andrews, 1932-): BCS 회장. 개혁주의 침례교인. 1960년대 휘트컴, 모리스의 영향으로 홍수지질학 전향. 그러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미국의 창조과학과 차이가 있었다. 열역학 2법칙이 타락이 아닌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 젊은 지구론 교리화 거부. 창조의 첫날은 무한한 길이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고 하였음.
- 데이비드 왓츠(David C. Watts, 1945-): 휘트컴, 모리스 홍수지질학에 대해 유보적 입장. 그러나 앤드루스보다 미국 창조과학과 훨씬 의견이 달랐음. 미국인들이 지구의 나이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는 걸 비판. 에덴 창조 이전에 지구상 생명 존재 가능성 인정. 휘트컴, 모리스 홍수지질학이 기독교인 지질학자들의 관심을 적법하게 요청하는 유일한 견해가 아니라고 함. 왓츠는 경직된 창조론에서 계속적 창조론으로 옮겨감. 진화론자가 아닌 복음주의 과학자들이 말씀에 굳게 헌신함에도 불구, 좁은 정의 때문에 자신이 창조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함.
- BCS는 홍수의 지질학적 중요성을 다루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음. BCS 회원들은 대홍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음. 대홍수가 방주의 생물을 제외하고 모든 생물을 제거했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
- 주요 인물
- 1970년대 초 진화반대운동(EPM)은 홍수지질학을 마지못해 인정. 70년대 중반 데이비드 로즈비어(David T. Rosevear, 1934-)같은 젊은 지구론자들이 가입하면서 틸니(Tilney)와 간격이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주목을 빼앗아감. 로즈비어는 간격이론, 날-시대 이론을 싫어함. 세력이 커지고 EPM은 1980년에 창조과학운동(Creation Science Movement, CSM)으로 이름 변경.
- 영국의 세 단체인 BCS, EPM, CSM 모두 홍수지질학을 받아들였지만, 가입 조건으로 꼭 홍수지질학을 믿어야하는 건 아니었음.
- 웨일스 출신 화학자 몬티 화이트(A. J. Monty White)는 창조연구회(CRS)에 가입. 영국의 세 단체에 대해 비판했다. 미국의 창조과학 운동과는 차이점이 있다고 함.
- 미국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미국산 사상을 들여와서.
- 영국의 창조론자들은 BBC 방송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기 위해 애썼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함.
전세계를 향하여
편집영국의 진화반대운동(EPM)은 해외에서도 노력했지만, 성과는 영국에서와 같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창조과학이 생기면서 그들의 입지가 위협받았다. 북미에서 EPM은 여러번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 그러다 1960년대 후반 농업 통계학, 경제학자 데니스 버로우스(W. Dennis Burrowes, 1918-)를 찾음. EPM과 CRS의 중간 노선을 찾으려 함.(호교론과 교리주의 사이) 1988년 버로우스는 CSM 내부 젊은 지구 정통주의를 지원하기도 그렇고, 동료 창조론자들과 싸우는 것도 그래서 그만두었다.
내용주
편집각주
편집- ↑ 20쪽
- ↑ 32쪽
- ↑ 27쪽
- ↑ 43쪽
- ↑ 44쪽
- ↑ 53쪽
- ↑ 54쪽
- ↑ 55쪽
- ↑ 57쪽
- ↑ 58쪽
- ↑ 58쪽
- ↑ 60쪽
- ↑ 63쪽
- ↑ 14.0 14.1 72쪽
- ↑ 114쪽
- ↑ 117쪽
- ↑ 119쪽
- ↑ 120쪽
- ↑ 19.0 19.1 132쪽
- ↑ 137쪽
- ↑ 138쪽
- ↑ 139쪽
- ↑ 251쪽
- ↑ 264쪽
- ↑ 262쪽
- ↑ 295쪽
- ↑ 355쪽
- ↑ 364쪽
- ↑ 400쪽
- ↑ 407쪽
- ↑ 441쪽
- ↑ 488쪽
- ↑ 548쪽
- ↑ 549쪽
- ↑ 554쪽
- ↑ 559쪽
- ↑ 561쪽
- ↑ 567쪽
- ↑ 29쪽
- ↑ 28쪽
- ↑ 596쪽
- ↑ 597쪽
- ↑ 599쪽
- ↑ 633쪽
- ↑ 635쪽
- ↑ 659쪽
- ↑ 661쪽
- ↑ 680쪽
- ↑ 681쪽
- ↑ 682쪽
- ↑ 683쪽
- ↑ 730쪽
- ↑ 733쪽
- ↑ 734쪽
- ↑ 7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