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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성립
편집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당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신하가 되어 나주지방을 점령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면서 폭정을 일으키자, 궁예를 축출해내고 추대의 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태조 왕건은 918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제정하고, 송악으로 천도하여 고려를 건국합니다. 이후 신라가 935년 항복하고, 견훤이 귀순하면서 후백제를 정벌합니다. 결국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있던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당했고, 그 때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귀순하게 됩니다. 왕건은 이들을 등용하는 등 민족 포섭 정책을 폈습니다. 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발해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여 고구려의 계승을 더욱 확실히 한 것입니다.
고려 태조의 시기
편집후삼국 시대를 통합한 태조는 신라 말의 혼란이 가혹한 조세 수취라고 생각하였고, 취민유도 정책을 실시합니다.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둘 때, 도, 즉 일정한 법도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율을 수확량의 1/10 수준으로 낮추고, 호족들이 백성들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는 농민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국가의 세금 수취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흑창을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어서 태조는 후고구려의 관제를 참고하고,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조하여 새로운 정치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총 29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결혼을 하였는지 실감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인 정책은, 태조 사후에 왕권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태조는 지방 호족들의 향촌 지배권을 다소나마 인정해 주고, 공신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태조는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도입하여 호족들을 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심관 제도란, 지방 출신 관리들에게 지방의 세력을 인정해 주는 대신, 그 지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사심관에게 그 책임을 묻는 제도입니다. 기인 제도는 호족들의 자제를 수도에서 일정기간 머물게 하여 출신 지방에 대한 자문을 구하도록 한 제도인데, 일종의 인질 제도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입니다.
태조는 또한, 정계와 계백료서라는 서적을 남겨 후대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또, 훈요 10조를 남겨 고려의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을 서경으로 하여 중하게 여겼는데, 이는 고구려의 땅이고 남은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고구려 계승 의식의 일환입니다. 심지어 서경에 국왕이 일정 기간 머물도록 한 제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북진정책은 국경을 청천강~영흥만을 잇는 선이 되도록 일조하였습니다.
고려 광종의 시기
편집태조 사후 혼인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나 왕권이 약화되고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왕규의 난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혜종, 정종을 지나 왕위에 등극한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노비안검법입니다. 노비안검법은 본디 양인이었던 자가 전쟁을 통해 노비가 된 경우를 조사하여 해방토록 한 제도입니다. 이러한 노비안검법은 호족을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노비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당시의 상황이 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양인을 늘려 세금 수취의 대상을 늘리기도 하였는데, 국가 재정을 양호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재정 증가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공복을 제정한 것입니다. 품계마다 옷의 색을 달리 해 서열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배층 사이의 엄격한 선을 나눈 것이지요. 이는 과거제도의 시행과 맞물려 있습니다.
바로 세 번째, 과거제도입니다. 과거는 학자인 쌍기가 권유하여 시행한 것으로, 유교와 문학에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는 제도입니다. 당시 공신들이 가득하던 정계에 왕권에 따르는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킨 것입니다.
네 번째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광종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고, 광덕과 준풍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불안정했던 왕권을 강화하고,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조금 더 안정된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고려 성종의 시기
편집고려의 정치질서가 전체적인 안정성을 갖게 된 때는 바로 성종 때입니다. 성종은 즉위 이후 신하들에게 정치에 대한 비판과 폐단을 제시하고, 시행할 정책에 대한 글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승로의 시무 28조가 채택됩니다. 여기서 최승로는 앞의 5대 왕들의 업적과 잘잘못을 논하면서, 불교의억제와 유교 정치를 제시하고, 외관을 두는 것을 건의합니다.
성종은 시무 28조를 토대로, 전국에 12목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외관, 즉 지방관을 파견하도록 합니다. 지방관이 파견되면, 기존의 지방 호족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아전이 됩니다. 성종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향리 제도를 마련하고, 지방세력을 국가 통제아래 두는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또, 성종은 국자감을 정비하고 유학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지방에 의학박사와 경학박사를 두었고, 이러한 유학 교육을 받은 과거 출신 관리를 우대하려고 하였습니다.
성종은 또한, 통치체제를 개편합니다. 2성 6부제를 기반으로 송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두어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게 하였습니다.
- 중서문하성: 고려의 최고관서로,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재신과 낭사가 있었습니다.
- 상서성: 정책을 집행하고, 6부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래에 이, 병, 호, 형, 예, 공부의 순서로 두었습니다.
- 중추원: 군사 기밀이나 왕명 출납의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추밀과 승선이 있었습니다.
- 삼사: 조선시대의 삼사와 달리, 고려시대의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를 보는 관청이었습니다.
- 도명마사, 식목도감: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이 추밀이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법, 관제 등을 다루었던 임시 기구입니다.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으로 지목되는 관제입니다.
지방 행정 조직
편집고려의 지방조직은 일반 행정조직이었던 5도와 군사 행정구역인 양계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3경과 4도호부, 8목과 군, 현, 진이 있었습니다. 5도에는 상설 행정기관 (항상 있는)이 없었고, 안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국경 지대에는 병마사가 파견되어 군사권과 행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는 군과 현 대신 특수 군사지역 진을 설치하였습니다.
12목에 외관, 즉 지방관을 파견했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 말은, 중앙에서 지방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작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현과 향, 부곡, 소와 같은 특수 행정구역은 주현의 통제를 받았고, 수령이 이를 주관했지만 실제로는 향리들이 주된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군역과 군사제도
편집군대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습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부대인 2군과 수도 및 국경을 방어하던 6위로 나뉘었습니다. 이들 중앙군은 직업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군인전을 지급받고 역을 대대로 세습하였습니다. 지방군은 군역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당시 군역은 16세 이상의 장정으로 구성되었고, 상비군이었습니다. 양계에 있었던 주진군과 5도에 있었던 주현군으로 나뉘었습니다.
문벌 귀족 사회 성립과 동요
편집성종 이후 호족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지배계층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중앙에서 몇 대에 걸쳐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던 이들을 문벌귀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과거와 음서제도를 통해 권력을 세습하였고, 공음전을 통해 경제적 특권까지 세습하였습니다. 이들 문벌귀족은 자신들 문벌귀족끼리만 혼인을 하였으며,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였습니다.
문벌귀족이 이렇게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동안, 몇몇 지방관료들은 왕의 측근 세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문벌귀족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 대표적 사례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자겸의 난
편집경원 이씨인 이자겸은 고려의 외척 세력이었습니다. 그의 딸들은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80여년동안 권세를 누렸다고 합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려 사회에서 문벌귀족 사회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에 대해서 사대관계를 수용하는 외교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왕의 측근세력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이자겸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는 왕의 측근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는데, 그 와중에 인종이 그의 무신 부하였던 척준경을 회유하는데 성공하면서 이자겸은 축출됩니다. 웃기게도, 척준경도 결국 축출되고,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편집무신정권
편집고려시대에는 무관을 뽑는 무과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무신의 지위가 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많은 차별을 받았으며, 때때로 군인전도 지급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차별 속에서, 정중부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 바로 무신정변입니다. 정중부와 이의방은 의종 당시의 무신들인데, 문신인 한뢰가 대장군인 이소응을 욕보인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정변을 일으킨 이들은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즉위시켜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무신들끼리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사병을 기르고 서로 권력다툼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문벌귀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대토지를 소유하였고, 백성들을 수탈하였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이러한 하극상의 풍조가 강해지면서,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농민들의 난을 일으키고, 각종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극상이 벌어지면서, 결국 최충헌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최충헌은 봉사 10조를 발표하고 각종 난을 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도 대토지를 소유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렇게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최씨 가문이 권력을 몇 대에 걸쳐 물려받게 됩니다. 그들은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도방이라는 경호기관을 두었으며, 삼별초를 설치하였습니다.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는 자신의 집에 인사기관인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들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에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는 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사회는 혼란해지기만 하였습니다.
원 간섭기
편집몽골(원)에 패배하여 돌아온 고려 정부는 몽골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됩니다. 원은 먼저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그리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고, 원의 직속령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또한,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왕명을 '~조, ~종'이 아닌 '왕'으로 바꾸고, 앞에 '충'이라는 글자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첨의부로 통합해 격하하고, 6부는 4사로 통폐합하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하였습니다. 또한,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명칭을 바꿉니다. 도평의사사는 권문세족의 회의기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원나라는 또한, 일본 원정 준비를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합니다. 정동행성이 설치된 이후 원정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루가치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내정을 간섭하게 됩니다. 이것 외에도, 공녀를 징발해 갔는데, 이러한 이유로 조혼이 성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를 징발하는 응방이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원의 세력에 기댄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농장을 소유하였고, 백성들을 수탈하였습니다.
공민왕
편집권문세족들은 친원파로 정치적 권세를 얻어 백성들을 수탈하였습니다. 양민을 노비로 삼기도 하였고, 대농장을 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고, 많은 공전들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들에 대항하여 나타난 것이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왔던 신진 사대부들입니다. 이들은 지방 중소지주 출신들로, 왕권을 뒷받침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 때 공민왕은, 개혁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먼저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절대권력을 누리던 기철을 제거하였으며, 강력한 반원 정책을 폈습니다.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습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고, 요동지방을 공격하였습니다. 공민왕은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고,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본디 양민이었던 자가 노비가 되었으면 이들을 해방시켰고,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들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권문세족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국가 재정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은 신돈을 해하고 공민왕도 시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치들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